황국화를 바라보며 가을을 맞았다.......~
이제 이른아침 일찍 안개를 자욱히 가리우고 아침해를 기다린다. 뜨거운 여름을 맛보다 이른아침의 서늘함이 온몸을 덮는다. 세월은 이렇게 무거웁게 우리들이 아직은하고 모르게 서물서물 다사온다. 그래서인지 이 화분에 키워진 황국을 보자니 왠지 시간을 알게하는 시계 분침 처럼 내 곁에 가을이 오고 있음이다. 나는 유달리 국화를 좋아하는데, 할일 많은 때 마당에서 국화옆에서 낙엽은 쓸지 않고 향기만 맏고 있다가 어머니에게 저게 무슨지릴이고 호사를 저렇게 좋아할꼬 라며 나약한 나를 질책하며 하든말이다. 가난한 집이였지만 공부잘하는 큰오라버니를 두어서인지 우리집은 아버지오빠 다들 책을 무척 좋아해 시집이 가득하고 영문학 전공인 내 큰오버니의 영어로 가득한 타임지 잡지와 영문학에 관한 책이 거득했다.
책상 다리 밑으로 기어 들어가 옹알거리며 놀든 나를 아버지는 가만히 두었으나 오래비는 댑다 소리질러대다 오리혀 오래비만 야단 맞든 생각이 났다.내가 학교 입학전이니 만6세가 되든해이다 내오래비는 대구에서 학교 다니다 국군에 입대해서 육군 통역장교로 지낼때이다. 잠시 집에 내려 왔다가 책상에 앉으려다 내가 펼쳐 놓은 소굽놀이에 놀라 저리가라고 소리질러대어 오히려 오래비가 야단 맞었는데 나는 부보님의 늦둥이로 태어나 그래도 어릴적은 한껏 사랑 받았고 있을때라 , 그 후로 부터 나는 큰오래비를 아주 거리감이 있었다 우리집에는 큰오래비가 공부를 넘 잘해 주위에 평판이 온집안에 칭찬을 한 몸에 받다 보니 오만 방자한 구석이 좀 있었다 우리 엄니는 우리에게 아버지 다음으로 이인자가 되기로 건들릴자가 아버지 외에 아무도 없었다.
오냐오냐하다가 우리큰 오래비는 넘 개인주의였고 일찍 국군에서 통역장교로 지내다 보니 미군들과 교류로 너무 강한 개인주의인 양키 문화를 영향을 받아들여 많이 한국적이지 않은면이 많아 미국을 동경하여 이민을 가고 싶어했다.내가 왜 이 글을 쓰나하면 추석명절을 지내다보니 아픈 가족사가 떠오르기 때문에 아픈 추억이 나를 자주 울렸다. 그래서 가족들의 부양의 책임을 거부하고 결혼후 마누라가 똑같은걸 만나 책임은 거부하고 맨달 논밭을 팔아달라고 부회를 질러 동생 생각은 않고 자기만을 위하지 않으면 싫어했다.
부모님들은 마지라고 넘 큰기대에 시골에서 그당시 사립학교인 계성중학교를 입학하여 다녔다. 그래서 유도를 배워 그사진이 타임지에 게제되기도 했엇다 어릴때 부터 일등 그리고 이름나기를 했으나 가난한집을 개똥 취급했으니 겸손을 배우지 못했다. 인생은 자기를 제어하고 분수를 알아야 하는 인생제도행은 육가원칙인 동양고전이 나는 맞다고 본다. 우리집은 일찍 서양문물에 접해 있어서 선교사가 우리집 방문하는 일이 많아 서양문화의 영향이 많아 과자도 많이 얻어 먹고 했다.
가을에는 무엇을하랴 하는 생각에 돌아다 보니 지난날의 배움이 오히려 행실에 독이 된 걸 보고 가슴아프게 한 우리부모님들의 속상했든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난다. 결혼후에도 잦은 마찰을 우리올케가 더욱 일으켜 맨날 편한날이 없었다. 잘못을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까달대다 어른이 된 나를 제사문제로 나에게 나에게 돈을 요구하려다 된통으로 부딪쳤다. 그후로는 우리는 얼굴을 보지 않고 살았다
돈은 무조건 우리가 큰오래비가 하자면 하라는대로 죄다 주었야한다는 마지 우월주의가 있어 나불대다 우리가 죄다 크고 난후에 우리 올케는 알밤 도토리가 되었다.
이가을은 계절이 오고감에도 좋으나 계절이 주는 가을의 결실에서 노력이라는 말을 곡 기억하여야 결실을 아는자가 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희생과 책임이 따르고 교육은 언제나 미래와 희망의 결실이기에 우리는 미리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어저께밤에는 보름달이 환희 비추었다 . 잠이 오질 않아 마당을 거닐다 화분을 보았다 기온의 차로 차분히 서리를 뒤집어 쓴채로 아침해를 기다리는 모습이 내가 한없이 그 무엇을 알게 하였다. 인생도 이러하리니하고 인내를 하며 기다리는 모습에서 나를 찾았다 슬픔에서 ........~~